데뷔 62년 차, 평생을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온 배우가 있다. 바로 ‘국민 배우’ 이순재(83)의 이야기다. 영화와 드라마를 합쳐 200여 편의 작품을 선보였던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좀처럼 쉴 생각이 없다. 그리고 올 봄, ‘덕구’로 7년 만에 스크린 나들이에 나선다. 이미 숱한 작품을 찍어왔지만 이순재의 얼굴엔 설렘이 가득했다.

 

영화 ‘덕구’(감독 방수인)는 어린 손자와 살고 있는 일흔 살 덕구 할배(이순재)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되고,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질 두 손주들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푸근하면서도 엄한, 오랜 세월 이순재가 쌓아온 이미지에 꼭 어울리는 역할이다.

“영화를 저도 보긴 봤는데, 사실 결정적으로 울어야하는 장면을 놓쳤어요.(웃음) 정서적인 힘이 아주 큰 영화라서 궁금했는데, 아이들을 위탁 보내는 장면이나, 집을 나간 며느리를 찾는 장면에서는 절제가 안 되더라고요. 오랜만에 시나리오 쪽에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이 나온 것 같아요.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힘이 있어요. 근래에 가장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였지요. 읽자마자 하고 꼭 출연 싶었어요.”

이순재는 ‘덕구’에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 그가 얼마나 이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배우’라 불리는 그의 여전한 열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달라고 해봤자 많이 줄 것 같지도 않았어요.(웃음) 사실 배우라는 게 여러 조건을 따지긴 하지만, 좋은 작품과 좋은 역할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거든요. 이건 돈 이전의 상황이에요. TV드라마에서 나보다 훨씬 많이 받는 젊은 배우들도 많아요. 물론 자존심이 상하지만, 연기로서 성과를 내고 의미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게 제겐 더 중요합니다. 연기도 예술이니까요.”

 

이순재는 아직도 식지 않는 연기에 대한 애착을 가진 배우지만, 의외로 영화출연은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 이후 꼬박 7년 만이다. 7년 만의 영화라는 소식에 배우 본인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벌써 7년이나 됐군요. 그런데 요즘 영화계에 제가 주연을 할 만한 소재의 작품이 많지 않아요.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이제 나이 먹은 할아버지니 어쩔 수 없지요. 좋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점점 노련한 연기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조금은 아쉽네요.”

그러나 최근엔 ‘덕구’를 비롯해서 ‘아이캔스피크’(2017), ‘비밥바룰라’(2018) 등 시니어 배우들이 활약하는 영화가 꾸준히 개봉하며 관객들의 호응을 끌고 있다. 노련한 배우들이 조금씩이지만 다시 역량을 뽐내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순재는 환하게 웃으며 “아주 기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전했다.

“영화는 소재가 다양해야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다양성이 공존해야 배우들의 연기 폭도 넓어지고, 또 관객분들도 취향껏 영화를 골라보는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요즘은 계속해서 영화들이 흥행을 노리고서 한쪽으로만 쏠리는 경향이 강한 것 같네요. 시대에 따라 유행이란 건 돌고 돈다지만, 너무 한쪽으로만 쏠리는 건 지루해지기 십상이니까요. 영화 발전을 위해서라도 실험적인 작품들이 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순재는 “‘덕구’에서 가장 좋았던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함께 호흡을 맞춘 아역배우 정지훈과 박지윤을 이야기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60여 년의 연기 생활동안 ‘안성기’ ‘강수연’ 등 명품 아역배우들과 수없이 합을 맞췄던 그의 입에서 나온 찬사이기에 놀라움은 더해졌다.

“이번에 제 손주로 나오는 친구들, 덕구(정지훈)와 덕희(박지윤)는 참 물건이에요. 애들이 너무 잘하면 징그럽잖아요. 그렇다고 톤을 쉽게 조절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그런데 걔들은 절제가 되더라고요. 아주 대단해요. 더 크면 얼마나 잘 될지 상상도 안 가요.”

과거 50년대부터 연극, TV드라마, 영화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누벼온지 벌써 60년이 훌쩍 넘었다. 배우로서 정점에 올랐지만, 어느새 뒤를 돌아보는 연기판의 최고 원로가 됐다. 그에게 “연기 인생 60년을 돌아보면 느낌이 어떻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오직 ‘이순재’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 되돌아 왔다.

“연기는 끝이 없죠. 60년 넘게 했는데, 저도 모르겠어요. 예술이란 게 그런 거죠.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대단한 음악가지만 그들이 음악의 완성은 아닌 것처럼,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할 수 있어도 끝에 다다를 순 없어요. 그러니까 배우는 계속 통찰력을 갖고 창조를 해야 해요. 연출가의 지시로 움직이기만 하는 건 기계예요. 배우는 작품 위에서 놀아야합니다. 그래야 자기 연기 인생을 오롯이 대중 앞에 선보일 수 있는 거지요.”

 

더불어 이순재는 최근 문제가 된 연극계 인사들의 성추문 문제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전했다.

“흔히 우리는 영화에 대해 감독의 예술, TV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연극에선 무엇보다 배우가 앞서야 하는데, 우리나라 연극계는 연출이 앞으로 나서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요. 그러다보니까 은연 중에 연출가에게 제왕적 위치가 생기는 것이지요. 피해자들이 하나 같이 그들을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 때문에 폐단이 생기는 거예요. 이번 일들을 계기로 이런 연극계의 풍토가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진 최교범(라운드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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