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극장가 성수기를 맞아 한국영화들의 선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선두에 서있는 작품이 지난 14일 개봉한 ‘강철비’(감독 양우석)입니다. 개봉 6일 만인 지난 19일 누적관객수 209만289명을 기록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지요. 매년 겨울 이어지는 한국영화의 흥행은 꽤 익숙한 일이지만 왠지 이번 ‘강철비’의 흥행은 조금 더 재밌습니다.
 

솔직히 ‘강철비’의 장르를 무엇으로 구분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블록버스터로 볼 수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정치영화의 범주로도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서사 중 하나로 활용되는 게 바로 정치 갈등인 까닭이지요.

극 중 핵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에 대해, 남한 내에서 여러 의견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갈등하지요. 북에 대한 선제 타격을 주장하는 현직 대통령 이의성(김의성), 그리고 전쟁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다는 대통령 당선인 김경영(이경영)의 대립은 그 어느 정치영화보다 첨예합니다. 보통의 정치영화라면 관객들은 으레 심정적으로 한 쪽 편을 들기 마련이지만, 이 둘의 생각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줄 수 없을 만큼 탄탄한 논리를 갖추고 있지요. 심지어는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북한 쿠데타 세력들의 당위도 꽤나 그럴 듯합니다. 관객들조차 골머리를 싸매게 하는 딜레마의 매력을 잘 활용한 작품입니다.

이 정도로 정치 갈등‧국제정세를 멋지게 표현한 작품은 꽤나 오랜만에 만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철비’를 정치영화의 범주로도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앞서 ‘강철비’의 흥행이 재미있다고 한 까닭은 ‘정치영화’라는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돌아보면 요 몇 년 간 극장가엔 현실 정치를 비판한 영화들이 무수히 쏟아졌습니다. ‘내부자들’(2015)이 그랬고, ‘더 킹’ ‘특별시민’(2017) 등이 현실을 향해 일갈을 날리며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완고한 위치의 흥행코드로서 자리매김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강철비’가 재미있는 점은 이들과 다소 궤적을 달리 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부자들’ ‘더 킹’ ‘특별시민’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고수하며 만들어진 듯 보입니다. 이 영화들에서 딱히 선하다고 확정지을만한 인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내부자들’ 속 우장훈(조승우) 검사 정도랄까요.

나머지는 장필우(이경영) 이강희(백윤식‧이상 ‘내부자들’), 한강식(정우성‧‘더 킹’), 변종구(최민식‧‘특별시민’)처럼 모두 권력과 돈에 눈이 먼 악인이거나, 혹은 박태수(조인성‧‘더 킹’)나 안상구(이병헌‧‘내부자들’)처럼 그 악인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복수를 꿈꾸는 작은 악인들만 있을 뿐입니다. 결국 누가 이겨도 현실은 악인의 요지경 속이라는 짙은 허무주의가 배경에 깔려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지난해까지 이어진 우리네 정치상이 관객들을 부정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강철비’에선 이 허무주의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전쟁 위기 앞에서 머리를 싸매게 하는 어려운 정치적 문제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관객들의 시선은 악인이 아니라 선한 인물들에게 쏠립니다. 남한 곽철우(곽도원)와 북한 엄철우(정우성), 핵폭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개인, 철우의 행보가 왠지 모르게 믿음직합니다. 어쩌면 관객들이 올 초, 작은 개인들의 힘으로도 거대하고도 힘든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변화된 지점은 또 있습니다. ‘내부자들’ ‘더 킹’ ‘특별시민’ 등은 현실 대한민국에 만연한 문제점을 찌르고, 왠지 모르게 현실과 기시감을 느끼게끔 해 비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었지요. 하지만 ‘강철비’는 현재와 가깝지만 아직 벌어지지 않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런 배경 시기의 변화가 왠지 모르게 더 희망차게 다가옵니다.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관객들이 극장으로 도피해 현실과 유사한 영화 서사를 보고서 욕을 하고 털어버리는 게 아니라, 보다 희망찰 수 있는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는 증거처럼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저는 이번 ‘강철비’의 흥행에서 대중의 가슴에 콕 박힌 ‘옳은 정치’에 대한 기대감을 확인한 것만 같습니다. 지난 1년 간 촛불혁명을 거치고 또 정권이 바뀌면서 경험해온 모든 것들이 영화 시장의 흥행 코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앞으로는 이 흐뭇한 변화를 조금 즐기면서, 이어져 나올 희망찬 영화들에 대한 기대도 살포시 더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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