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사고로 남편을 잃은 32세 효진은 친구와 함께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며 혼자 살아간다. 상실감과 공허함 속에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죽은 남편의 아들인 16세 종욱이 나타난다. 그를 거두던 할머니마저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통에 오갈 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효진은 고민 끝에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종욱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다.

 

 

배우 임수정이 데뷔 이후 처음으로 엄마 역을 맡았다고 화제가 된 ‘당신의 부탁’(감독 이동은·4월19일 개봉)이다. 30대임에도 ‘방부제 미모’ ‘초동안’ ‘뱀파이어’ 소리를 줄곧 들어왔기에 이슈가 됐을 만했다.

“몇 년 전부터 엄마 역이 들어온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지 했던 터라 그렇게 당황스럽진 않았어요. 다만 효진이 당황했던 것처럼 너무 큰, 열여섯이나 된 아들이라 어떻게 연기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죠. 더욱이 제가 미혼이고, 아이 낳아본 경험이 없으니까. 실제 내 아이인 설정이었다면 조금은 도전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은 들어요. 첫 엄마 역이지만 진짜 엄마와 아들이란 관계를 규정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가족이 돼가는,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중요한 영화라 접근하는데 부담은 덜했고요.”

기대 반, 우려 반이었음에도 영화 속 임수정은 엄마 연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해낸다. 종욱(윤찬영)에게서 죽은 남편의 모습이 일순 보여서, 아무도 돌봐줄 이 없는 아이가 인간적으로 불쌍해서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 때로는 보호자처럼, 때로는 ‘밀당’하는 친구처럼 종욱과의 관계를 그려간다. 평소 암팡지게 액팅하는 배우로 평가받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그의 표정이나 동작, 대사 처리는 과거 출연작들과 견줬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깃털처럼 가볍다. 감정을 잔잔하게 다스리는 능력은 탁월하다.

 

 

“이렇게까지 힘을 빼고 연기한 적이 없어요. 걷거나 말할 때, 감정 표현할 때 힘이 안 들어갔어요. 이상하게. 그게 효진답다고 생각했고, 그 어느 때보다 연기적으로 유연해진 게 느껴졌어요. 나의 연기가 확장되고 깊이감도 생기고...스스로 그런 게 느껴졌어요. 배우는 가끔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만나야 연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혈연에 기초한 가족구성이란 전통 혹은 견고했던 관념이 붕괴되고 있는 현실에서 영화는 유사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싱글이어도 엄마가 되고, 내 혈육이 아닌 아이의 엄마가 되는 스토리는 영화, 드라마, 연극 등을 통해서 속속 다뤄지고 있다. 임수정 역시 싱글이다. 그는 어떤 생각일까.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고민일 듯해요. 그런 상황이 제게도 생길 수 있고요. 만약 평생 함께 살고 싶은 남성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아이가 있는 돌싱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고민이 되겠죠. 지금으로선 선뜻 ‘효진처럼 할 수 있을 거 같아요’라고 말할 순 없으나 혈연만이 가족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우리 사회에서 가족이란 개념이, 그 범위가 자유롭게 변할 수 있다는 인식을 평소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영화에는 효진 뿐만이 아니라 역술인이 된 죽은 남편의 두 번째 부인(김선영), 막 아이를 출산한 효진의 친구(이상희), 잔소리를 일삼는 효진의 엄마(오미연), 10대 미혼모가 돼 아이를 입양 보내는 종욱의 여사친(서신애) 등 다양한 유형의 엄마가 등장한다.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이 진짜 엄마 같아서 오미연 엄마가 좋았어요. 선생님이랑 다투는 신을 찍을 때 ‘엄마한테도 이렇게 짜증내고 화내고 소리 지르고 그래요. 죄송해 죽겠어요’라고 말씀 드렸더니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그게 엄마와 딸이지 뭘’ 그러시더라고요. 나의 엄마처럼 헌신적으로 자식을 돌보진 못할 것 같아요. ‘너 알아서 커라’ 하고 싶은데 성향이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편이라 걱정이에요. 개인적으론 최근 본 ‘리틀 포레스트’ 문소리 엄마가 너무 좋았고요. 내 생을 살겠다며 가출하는.”

‘미사’의 소지섭을 비롯해 강동원 현빈 이선균 유아인 공유 정지훈 이진욱 조정석 김래원 황정민 연우진 유연석 등 숱한 톱클래스 남자배우들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호흡을 맞춰왔다. 누구와 다시 공연해보고 싶냐고 물으니 ‘강동원’을 꼽는다. ‘전우치’(2009)에서 너무 짧게 공연했기 때문이란다.

“매력적인 남성 배우들과 많이 작업해왔으나 전 여배우들과의 케미가 좋다고 자부하거든요. 이번 작품에서도 이상희 배우랑 너무 좋았고요. ‘...ing’(2003)에서 이미숙 선배와도 연기 재미가 컸고 잘 맞았어요. 무려 4명의 여배우(임수정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가 주연했던 ‘더 테이블’(2017)에서는 안타깝게 여배우들이 만나는 신이 없었죠. 여배우들끼리 뭔가를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았으면 해요. ‘오션스’ 시리즈처럼 그녀들끼리 모여서 사기치고 그러는.”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1차 관객’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읽는다. 내용, 캐릭터의 개연성이 납득돼야 하지만 최근 마음이 가는 캐릭터는 ‘남이 뭐라 해도 내 길을 가겠소’ 하며 삶을 개척해가는 인물들이다. 효진도 어떤 면에선 그런 인물이었다.

“과거엔 나랑 닮은 캐릭터나 연민 가는 캐릭터를 표현해보고 싶었는데 요즘은 ‘네가 가는 길이 혼자라면 내가 같이 가줄게’란 마음이에요. 엄마 역이 들어오면 나한테 어울리기만 하면 또 할 거 같아요. 몸과 마음을 다해서 열렬히 사랑하는 캐릭터, 전문직 여성도 해보고 싶어요. 아직도 해보고 싶은 게 많네요.(웃음)”

최근 영화를 소개하는 팟캐스트 진행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목소리 톤이 좋아 DJ, 영민함으로 인해 영화 기획·연출로 영역을 확장해도 큰 수확을 거둘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팟캐는 자유로운 매체다보니 거침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재미나더라고요. 라디오는 워낙 좋아하는 매체라 계속 관심을 가져왔어요. 개편 때마다 DJ 제안은 들어왔으나 매일 출근하는 것에 대한 용기가 나질 않았죠. 머지않은 시간에 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 제작·기획·출연에 관심이 많아요. 감독이 구해지질 않으면 도전해볼 생각도 있고요. 내 이름을 내건 쇼를 만들어보고 싶기도 해요. 무엇보다 올해엔 에세이를 꼭 출간하려고요. 30대 여성으로서의 감정. 관심사, 배우의 얘기 등을 담은 건데 출판사와 논의 중이에요.”

 

사진=명필름/CGV아트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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