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이 5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으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선택했을 때 으레 ‘멜로퀸의 귀환’에 기대가 모아졌다. 지금껏 스릴러, 액션, 모험, 공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품에 임해왔지만 팬들 입장에선 멜로퀸 손예진을 향한 열망이 컸다.
 

‘연상연하 커플’ 정해인과 손예진의 케미는 방송 초반 시청률과 화제성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연하남 정해인과 예쁜누나 손예진이 오랜 지인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달콤한 명대사와 명장면을 쏟아내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후반부로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윤진아 캐릭터를 둔 시청자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서준희와 연애를 번복하는 과정에서 이른 바 ‘고구마’ 전개가 이어진 까닭이다.

“이 드라마 주인공은 윤진아고요. 윤진아의 성장기를 그리는 거죠. 거기에 서준희가 딸려 들어오는 거고요. 서준희의 성장기는 타자로, 그리고 편린으로 보여주게 될 것 같습니다”

- 안판석 PD, 4월 26일 기자간담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제목부터 멜로를 표방하고 있지만 30대 직장 여성 윤진아의 성장기를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결혼상대는 이래야 한다’는 엄마 김미연(길해연 분), ‘나는 바람 펴도 너는 절대 피지 마’ 식의 적반하장 전 남친 이규민(오륭 분), ‘접대는 여자 몫’이라고 생각하는 직장 상사들까지. 윤진아는 오랜시간 주변의 폭력에 노출돼 본인의 의지마저 상실해 버린 수동적인 인물이었다. 이규민이 이별을 고하며 말한 “곤약같은” 무색, 무취, 무미에 가까웠다.
 

육체적인 나이도, 정신적인 나이도 성장했다고 생각한 30대 윤진아에게 서준희라는 변화의 계기가 찾아 들기 전까지는. 서준희는 윤진아를 하나의 인격으로 오롯이 존중한다. 엄마의 딸, 누군가의 여자친구, 성실한 월급쟁이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윤진아를 사랑하고 아껴준다. 윤진아는 이런 서준희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를 깨닫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직장내에서의 태도였다. 안하무인 꼰대 공철구(이화룡 분)의 무리한 요구에도 ‘예스맨’을 자청하던 윤진아의 변신은 강세영(정유진 분)과 금보라(주민경 분)를 놀라게 만들었다. 회사에 몰아친 성추행 파문에서도 윤진아는 ‘좋은 게 좋은 거다’ 식의 타협이 아닌 “끝까지 가겠다”는 전투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서준희와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윤진아에게 골이 났다. 여기에 종영까지 한 회를 앞둔 시점에서 서준희와 미국행을 포기했던 윤진아가 새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되며 비난이 쏟아졌다. 심지어 새 남자친구는 과거 이규민이 그러했듯 윤진아를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태도를 보여 분노는 배가 됐다.

서준희와 해피엔딩을 바라는 바람이 위협을 받은데 대한 아쉬움도 있겠지만, 시청자들이 윤진아에게 ‘진짜’ 실망한 이유는 다시 ‘휘둘리는 인생’을 살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현실적인 전개를 강조해온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라는 점을 다시 하면 생각해보면 불편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리얼’ 상황인지도 모른다.

윤진아에게 서준희와의 연애는 일탈에 가까웠다. 서준희와의 연애부터 독립까지 윤진아의 ‘광폭 행보’는 그녀의 가족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현실의 윤진아와 현실의 서준희가 만난다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결말에 도달한다.
 

“제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느끼는 많은 것이 대본에 그대로 있어요. 자극적이지 않은 이야기, 공감 가는 상황과 대사들이요”

-손예진, 3월 28일 제작보고회

고구마 캐릭터라는 오명을 쓰기는 했지만 윤진아는 최소 절반의 성공을 이뤘다. 가슴 뻥뚫리는 사이다 대사들만 있으면 현실이 아닌 판타지에 가깝지 않을까. 물론 드라마라는 가공된 현실이라는 점에서 시청자들이 거는 기대가 ‘하이퍼 리얼리즘’이 아니다. 다만 극중 캐릭터의 성장을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연기한 배우 손예진과, 큰 판을 짠 안판석 PD의 수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진=드라마하우스, 콘텐츠케이

저작권자 © 싱글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