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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벌새’ 전세계가 먼저 반하다...14살 소녀의 찬란한 일상

14살 은희는 평범한 중2다. 방 3칸짜리 서민아파트에서 떡방앗간을 운영하는 부모님, 여고생 언니, 한 살 터울인 오빠와 함께 산다. 만화가를 꿈꾸는 그의 일상은 꿀벌처럼 바쁘다. 틈틈이 부모님 가게에서 일손을 돕고, 단짝친구와 한자학원과 콜라텍을 순례하고 뒷골목에서 입담배를 피워본다. 갓 사귄 남자친구와 심쿵하며 첫키스를 경험하지만 남친의 양다리와 남친 엄마의 반대로 막장드라마 같은 이별을 나눈다. 학교 후배 여학생으로부터는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는다.

지극히 평밤해보이는 일상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 남아선호사상에 찌든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노골적인 차별을 서슴치 않는다. 고단한 현실에 지친 엄마는 무심하다. 집안의 총애를 받는 오빠(a,k.a. 미친새끼)는 빈정 상하면 무시로 폭력을 가한다. 장난삼아 문구점에서 도둑질을 하다 붙잡힌 상황에서 단짝 친구는 그를 배신한다. 마음을 열고 교류했던 한문선생님 영지(김새벽)는 어느날 갑자기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은희의 작은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벌새’는 1994년을 배경으로 기억과 희망을 노래한다. 그해는 북한 김일성이 사망해 전쟁위기가 솟구쳤고, 사상 최악의 찜통더위가 전국을 달궜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추진, 진존파 납치살해사건, 연세대 독수리 5인방(서장훈 문경은 우지원 석주일 김훈)의 전국농구선수권대회 제패 등 사건사고가 꼬리를 물었다.

급변하는 현실의 한가운데 선 은희의 잔잔해 보이는 삶 역시 소용돌이쳤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성큼 다다른 은희에게 차별과 무관심, 폭력, 배신은 그의 현재를 이루는 어두운 조각들이다. 반면 꿈과 우정, 사랑, 교감의 기쁨은 반짝반짝 빛나는 부품들이다. 이 모든 것이 영지의 편지처럼 “참 신기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은희를 이끄는 자양분이었다.

‘벌새’는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을, 나쁜 일들과 좋은 일들이 함께하는, 기쁨과 절망이 교차하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누는 매력적인 한편 성수대교처럼 부실한 세상을 그리고, 그 세상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소녀의 성장기를 담담한 시선으로 스크린에 세공한다.

신예 김보라 감독은 대만 감독 에드워드 양, 일본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상되는 숨결로 1994년의 여름과 가을을 직조한다. 세심하고도 날카롭게 인물의 일상에서 시대를 경험하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무엇보다 놀라운 지점은 은희 역 박지후다.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라 담담하게 묻는 열일곱 여배우는 미지의 세계와 마주한 소녀의 대서사를 빈틈없이 그려낸다. 감정의 너울이 블록버스터급인 연기를 차분하게 조율해내는 면에서 '한공주' 천우희의 탄생을 보는 듯하다.

한문선생님 영지 역을 맡은 김새벽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서울대 출신의 노동운동가인 것으로 암시되는 영지는 은희와 정신적으로 교감하며 그의 꿈을 지원하고, 부당한 현실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복돋아준다. 유일하게 은희를 이해해주는 성숙한 어른으로 나와 깊은 감흥을 남긴다.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이번에도 은은한 향기로 스크린을 지배한다.

이외 정인기 이승연 박수연 손상연 박서윤 설혜인 정윤서 등 성인배우와 아역배우들 모두가 적재적소에서 빛나는 연기를 담당했고 촬영과 음악 역시 작품에 윤기를 더한다.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관객상,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네레이션 14+대상, 트라이베카 국제영화제 최우수 국제장편영화상·여우주연상·촬영상, 시애틀국제영화제 대상, 이스탄불국제영화제 대상, 말레이시아국제영화제 감독상·여우조연상·촬영상 등을 받았다. 러닝타임 138분. 15세 이상 관람가. 8월29일 개봉.

용원중 기자  goolis@s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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