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2세로 타계한 최은희는 20세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이자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틱한 영화였다.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납북과 탈출, 수백 편에 이르는 영화 출연과 제작·연출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돌아봤다.

 

사진=연합뉴스

고인은 1926년 11월 경기도 광주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방공연습을 갔다가 배우 문정복(배우 양택조의 어머니)의 소개로 극단 ‘아랑’의 연구생이 된다. 이후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뒤 극단 아랑과 극예술협의회 등에서 연기력을 연마했다.

최은희의 원래 이름은 경순이었으나 해방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미에서 여류 소설가 박화성씨의 소설 속 주인공 은희로 개명했다. 연극 무대를 누비던 그는 영화 ‘새로운 맹서’(1947)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큼직한 이목구비의 서구적인 미모와 동양적인 기품을 동시에 지닌 데다 연극무대에서 벼린 연기력으로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최은희와 마릴린 먼로[사진=영화 '연인과 독재자']

후배인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 여배우로 군림했고, 1954년 주한미군 위문공연 차 방한한 동갑내기 할리우드 톱스타 마릴린 먼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기도 했다.

‘새로운 맹서’를 촬영하며 김학성 촬영감독과 인연을 맺어 18세에 결혼을 했으나 불행한 결혼생활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길에서 헤어지는 것으로 파국을 맞았다. 고인은 1953년 신상옥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동갑인 신 감독과 사랑에 빠졌다. 결혼 경력이 있는 여배우와 일본 유학파 출신인 미남 인텔리 총각 신상옥의 만남은 당시 세간의 화제였고, 두 사람은 1954년 3월 한 여인숙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최은희와 남편 신상옥 감독[사진=연합뉴스]

1950년대와 60년대 전성기를 누리며 무려 1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하늘이 맺어준 인연' 신 감독과 ‘무영탑’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동심초’ ‘춘희’ ‘이 생명 다하도록’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열녀문’ ‘로맨스 그레이’ ‘벙어리 삼룡이’ '빨간 마후라' 등 다양한 장르의 숱한 영화를 감독과 뮤즈로 함께했다.

1965년에는 '민며느리'를 연출하며 감독으로도 데뷔했으며 67년 안양영화예술학교 설립·교장 겸 이사장을 맡았고, 극단 배우극장을 직접 운영하며 후배 연기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하지만 23년간 이어진 신 감독과의 결혼생활은 1976년 이혼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신상옥 감독은 배우 오수미와 1973년 영화 ‘이별’에서 함께 작업하며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최은희와의 이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 감독은 오수미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다.

이혼한 고인은 자신이 운영하던 안양영화예술학교의 해외 자본유치 차 78년 1월 홍콩에 갔다가 홍콩 섬 해변에서 북한으로 납치됐다. 그리고 8일 뒤인 1978년 1월22일 최은희의 열성 팬이었던 김정일의 환영을 받으며 평양 땅을 밟았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가운데)과 최은희-신상옥 부부[사진=연합뉴스]

납북 6년째인 1983년 3월 김정일로부터 연회에 초대받은 고인은 그 자리에서 신 감독을 만나게 된다. 신 감독은 고인이 납북된 그해 7월 사라진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다가 북한으로 끌려갔다. 일각에선 신 감독의 자진 월북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도 영화 활동을 지속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고, 최은희는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영화 ‘춘향전’에 쓸 부속품을 구하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갔다가 그곳 성당에서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두 사람은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현지 미국 대사관에 진입, 망명에 성공했다.

부부는 이후 미국에서 10년이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구 귀국했다. 최은희는 영원한 동반자 신 감독을 2006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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