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지나고 산업기반이 붕괴된 1970년대, 국가재건이라는 미명하에 외화벌이가 곧 애국이 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 범죄 영화가 탄생했다. ‘마약왕’은 ‘먹여살릴 처자식이 있고, 시집보낼 여동생이 셋인’ 그 시대의 가장이 스스로를 수출 역군이라 칭하는 마약왕이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금괴를 밀수하던 유엔대사(송영창)는 갑자기 단속이 뜨자 밀수조직의 꼬리인 이두삼(송강호)을 넘기고 달아나버렸다. 일명 ‘꼬리 자르기’의 희생양이 된 이두삼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평생에 트라우마로 남을 고문을 당하며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에 들끓기 시작한다. 명패가 곧 권력이던 시절에 전화한통 넣어줄 사람이 없었고, 때문에 가난의 설움이 그를 괴물로 변화시킨다.

돈 되는 건 다 하던 이두삼은 일본인 밀수 조직원을 대신해 사촌동생 이두환(김대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만난 이북출신의 김순평(윤제문)으로 인해 이두삼은 한국이 일본에 수출한 마약을 제조할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때부터 시대의 바람에 몸을 맡기기 시작한 이두삼은 빠르게 성장한다. 그리고 이런 이두삼의 변화 곳곳에는 음악이 함께한다. 대중가요에 몸을 흔들던 하급 밀수업자가 대저택에 앉아 우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마왕’을 감상하는 마약왕이 되기까지. 영화는 적재적소에 음악을 활용해 이두삼이라는 인물의 기승전결을 보다 유연하게 이끌어낸다.

일본으로 마약을 실어나를 물길을 트기 위해 최진필(이희준)를 찾아가고, 정재계 진출을 위해 로비스트 김정아(배두나)에게 줄을 대는 이두삼의 진화는 마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좋은 친구들’(Goodfellas) 류의 갱스터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이 영화들의 주인공들이 명예에 목숨을 건다면 이두삼은 돈과 권력에 집착한다. 하지만 1970년대 한국이라는 풍경에 대한 고찰을 장르에 고스란히 녹여내며 묵직한 메시지를 장르 안에 녹여냈다.

이두삼이 마약으로 쌓아올린 수출 금자탑의 최정점에 섰을 때 열혈검사 김인구(조정석)가 나타난다. 화려하고 위대해보이지만 결국 마약이라는 백색가루로 지어진 금자탑은 김인구라는 작은 변수에도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약왕’은 명품 배우들의 연기만 보고 있어도 ‘순삭’ 러닝타임을 보장한다고 할 정도. 먼저 이두삼의 조강지처인 성숙경 역을 맡은 김소진은 왜소한 체구에서 에너지를 뿜어낸다. 여기에 대체불가 배우가 되어 돌아온 조우진의 하드캐리, 마약에 중독자를 거부감없이 자연스럽게 그려낸 김대명 등 구멍없는 캐스팅을 자랑한다.

믿보배 송강호의 진화는 모두를 전율하게 만든다. 최근 몇해동안 서민적인 캐릭터를 줄곧 맡아오던 송강호가 화려해진 패션만큼이나 다채로운 연기톤으로 관객들을 현혹시킨다. 특히 후반부에는 1인극에 가까운 송강호의 독백이 흡인력을 끌어올린다.

우민호 감독은 ‘내부자들’에 이어 ‘마약왕’에서도 오락과 영화적 메시지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후반부 과거의 영광에 취한 이두삼을 향해 김인구가 건네는 “이제 그만 깨어납시다”라는 대사는 수단과 방법은 무시한 채 결과가 정의가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마약왕’은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 음악, 내러티브 등 과연 올해의 대미를 장식할 흥행 기대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러닝타임 1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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