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김지운 감독이 이번엔 SF 누아르를 들고 왔다. 배경은 근미래인 2029년으로, 사회 최고 화두가 통일인 시대다. 모든 갈등의 시초는 통일을 이루려는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이를 경계하는 강대국의 견제로 인해 발발한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인랑'은 '공각기동대'로 유명한 일본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1999년 장편 애니메이션 '인랑'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은 전 세계 마니아들 가슴으로 파고들며 SF애니메이션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인간성에 대한 질문, 묵시록으로 그려지는 세계, 우화를 이용한 비유가 애니메이션 '인랑'의 특징으로 꼽힌다. 영화는 원작의 특징을 옮기면서 조금 더 화려한 액션과 미쟝셴을 구현하려 노력한다.

남북한 정부가 통일준비 5개년 계획을 선포한 후, 강대국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고 민생은 악화된다. 이에 통일에 반대하는 반정부 무장테러단체 '섹트'가 등장한다. 정부는 대통령 직속 경찰조직 '특기대'를 통해 섹트를 소탕하기 시작한다. 특기대의 위상이 높아지자 '공안부'는 알력 다툼을 위해 특기대를 말살하려 한다. 절대 권력기관들의 암투가 피로 물드는 동안 특기대 내 비밀조직 '인랑'에 대한 소문이 돈다.

특기대 훈련소장 장진태(정우성)는 인랑에 대해 "늑대의 탈을 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늑대"라고 말한다. 인랑은 전신은 물론 얼굴을 가리고 활동한다. 그들의 존재는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갑옷으로 인한 묵직한 걸음 소리와 어둠 속에서 오싹하게 떠오르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피비린내로만 알 수 있다. 인랑의 임무는 적의 섬멸, 즉 살인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인간도 늑대도 아닌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과거, 착오로 인해 무고한 생명을 살해한 특기대 요원들이 가면 뒤로 숨으면서 죄책감과 인간성도 함께 어둠 속으로 밀어버린 것이 인랑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한 조각 죄책감을 미처 숨기지 못한 요원이 있었다. 바로 임중경(강동원)이다.

임중경은 섹트의 임무로 폭탄을 옮기던 소녀 '빨간 망토'를 죽이는 데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망설이는 사이 소녀는 자폭하고, 임중경은 소녀의 언니인 이윤희(한효주)에게 유품을 가져다주게 된다.

이후 영화는 임중경과 이윤희의 비극적인 관계와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윤희는 조직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였던 임중경의 마음속 죄책감을 자극한다. 이윤희에게 임중경은 비극 속에서 냉혹한 선택을 해야 했던 자신과 꼭 닮은 인간이다. 그래서 둘은 서로를 쉽게 외면할 수 없지만, 함께할 수도 없다. 연민과 애정 사이에 있는 임중경과 이윤희는 서로를 통해 희망을 엿보는 듯하다.

배우 강동원과 한효주의 투샷은 그 자체로 근사하지만, 둘의 로맨스에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임중경의 갈등은 차근차근 직조되며 관객의 설득을 이끌지만 이윤희의 감정선은 급박하다. 이윤희는 끊임없이 임중경을 흔들고 그가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도록 이끌지만 거기에 그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으로 입증된 김지운 감독의 액션은 폭발적이며 완성도가 높고 비주얼로서도 화려하지만 액션이 담은 멜로에는 의문이 남는다.

그럼에도 볼거리는 다채롭다고 할 수 있다. 근미래에 대한 여러 모습은 상상력을 자극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카 체이싱부터 총격전, 육탄전, 미로 같은 지하 수로를 두고 벌이는 대치는 긴장감을 높여 긴 러닝타임을 든든하게 지탱한다.

강동원, 한효주, 정우성, 김무열, 최민호 등 화려한 스타 라인업도 즐겁다. 허준호는 등장 자체로 남다른 무게감을 더한다. 한예리는 짧은 장면 속에서도 강렬하다. 냉소적인 눈빛 연기부터 액션 연기까지 한예리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빨간 망토 소녀로 등장하는 신은수의 불안한 표정도 기억에 남는다. 러닝 타임 139분, 15세 이상 관람가, 25일 개봉 예정.